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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인역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
 
지은이 : 이누준(지은이), 이은혜(옮긴이)
출판사 : 알토북스
출판일 : 2025년 11월




  • 만약 세상에서 가장 그리운 사람을 한 번만 더 만날 수 있다면, 당신은 무슨 말을 건네고 싶은가. 누구나 마음속에 아직 끝맺지 못한 인연이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떠나보낸 친구일 수도 있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님일 수도 있으며, 다가올 미래를 함께 꿈꾸던 연인일 수도 있다. 그리움은 삶을 이어 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루를 버티는 것조차 힘든 아픔이 되기도 한다.


    무인역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


    너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
    언제부터였을까. 집에 있는 시간이 이렇게 괴로워진 게. 가족이라고는 고작 셋뿐인데도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주변을 감싼 공기가 무겁고 축축하다. 가족 간의 다정한 대화는커녕 엄마는 입만 열면 벌써 입시 입시, 하면서 공부하라는 말뿐이고, 늘 무심한 얼굴로 신문만 읽던 아빠도 이때만큼은 엄마 편에 서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보탰다.

    몸을 웅크리고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데 눈높이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저 새처럼 자유로울 수 있다면. 하늘은 이렇게나 넓은데 이곳은 너무 좁아서 갑갑하다. 적어도 대학은 멀리 가야지. 그러면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치마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올해 일월에 부모님이 사 주신 내 인생 첫 스마트폰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엄마랑 싸운 이유도 핸드폰 좀 그만 보라는 잔소리 때문이었다.

    꺼내 보니 ‘아야카’라는 이름과 착신을 알리는 화면이 떠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야카는 이웃에 사는 소꿉친구로 외동딸인 나와는 동갑내기로 자매 같은 사이다. 내가 언니일 때도 있고 아야카가 언니가 될 때도 있다. 고등학교도 같은 곳으로 진학했지만 같은 반이 되지는 못했다.

    “목소리가 시무룩한 걸 보니, 너 또 엄마랑 싸웠구나?”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네 하소연 들은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너는 우리 엄마가 얼마나 집요한지 몰라서 그래. 내 일에 참견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아빠랑 진지하게 대화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아! 정말 싫어. 둘 다 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진정해, 너무 흥분하지 말고. 부모님이 두 분 다 계시면 좋지 뭘 그래.”

    순간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아야카의 엄마가 오래전에 집을 떠났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어릴 적 기억이라 어렴풋하지만, 키가 크고 날씬한 체구에 미소가 다정한 분이셨다.

    사실 아야카는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다. 입학식과 그다음 날까지는 제대로 등교했지만, 그 이후로는 등교한 날을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같은 반 아이들은 아야카가 나쁜 애들과 어울린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일요일, 슨자역에서 아야카를 만나기로 했다. 둘 다 사쿠메역이 집에서 더 가까웠지만, 아야카는 아는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다며 약속 장소를 항상 슨자역으로 정했다.

    오랜만에 본 아야카의 머리는 전보다 더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눈썹은 실 한 올을 올려놓은 듯 가늘다. 위아래로 맞춰 입은 선명한 핑크빛 트레이닝복 아래로 보이는 익숙한 스니커즈가 오히려 위화감을 자아낼 정도였다.

    “너, 경찰서에 갔었다는 게 사실이야?”
    “뭐야, 벌써 소문났어?”
    “네가 경찰서에 있는 걸 본 사람이 있어. 동네에도 소문이 퍼졌대.”
    “상관없어.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라고 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통화할 때 집에 가기로 약속했잖아.”
    “집에 가려고 했는데 잡힌 거야. 그 얘기는 그만하자.”

    금발의 머리를 찰랑거리면서 비탈길을 내려가는 아야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 걱정하는 사람 앞에서 보일 태도는 아니다.

    “아야카,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니까.”
    “잠깐 나랑 얘기 좀--.”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계속할 거야?”

    처음 듣는 싸늘한 목소리에 입이 다물어졌다. 돌아선 아야카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노려봤다. 그러다 자기도 실수했다 싶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다 얘기할 테니까... 오늘은 좀 봐주라. 안 그래도 우울하고 나름 반성도 하고 있단 말이야.”
    “알았어.”
    “그보다 이쪽이야. 이쪽.”

    아야카가 멀뚱히 서 있던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아야카였지만, 예전과 달랐다. 점점 내가 모르는 사람으로 변하다가 언젠가 홀연히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여기야.”

    아야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테라스 카페 산마리노’라고 쓰인 하얀색 건물이 있었다. 예전부터 있었던 곳이지만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아야카가 망설임 없이 창가 쪽 자리로 향하기에 나도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수염을 기른 남자가 다가와 유리잔에 담긴 물을 앞에 놓아 주었다. 백발의 노신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 남자가 마스터인 모양이다. 아야카가 냉큼 마스터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이제 질문해도 돼요?”
    “네, 말씀하십시오.”
    “노을 전철 말인데요.”
    “노을 전철이 아니라 ‘노을 열차’랍니다. 덴류하마나코 철도는 전기로 달리지 않으니까요.”
    “네, 네, 그게 뭐든, 아무튼 소문으로 들었어요. 그 노을 열차라는 걸 보면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다면서요?”
    “글쎄요. 그런 전설이 있기는 하죠.”
    “자세히 좀 말해 주세요. 그거 때문에 왔거든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노을로 물드는 시간, 승강장 의자에 앉아서 보고 싶은 사람을 마음속으로 그리면 그 사람이 노을 열차를 타고 만나러 온다,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고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뭐야? 무슨 소리야? 지금 한 얘기, 도대체 뭔데?”

    내가 호들갑스럽게 묻자 아야카가 멋쩍게 웃었다.

    “시내에 사는 친구가 비밀이라면서 몰래 가르쳐 줬어. 이 가게도 알려 줬고. 나도 반신반의했는데 설마 진짜 전설이 있을 줄이야.”
    “너, 미신 같은 거 예전부터 싫어했잖아.”
    “그랬지.”
    “그러면서 여긴 왜 온 거야? 정말이지, 요즘 너..., 너무 이상해.”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학교에 오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갑자기 화를 내거나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아야카가... 정말이지 이상하다.

    그때였다.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보던 아야카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엄마가 죽었대.”
    “어, 언제?”
    “반년 전에. 아팠다나 봐. 아버지랑 이혼한 지 꽤 됐잖아. 그래서 연락도 늦게 받았어. 내가 알았을 때는 이미 장례도 다 끝난 뒤였고.”

    아야카는 줄곧 혼자서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변해가는 아야카를 원망하기만 했다. 친구라면 먼저 알아줘야 했는데, 달라진 겉모습만 신경 쓰면서 멋대로 오해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난 괜찮아. 그래도... 노을 열차 얘기는 믿고 싶네. 정말 기적이 일어난다면 엄마를 만나고 싶어.”
    “응, 나도 믿어.”
    “그래, 그래야 내 친구지.”

    하얀 이를 보이며 활짝 웃는 아야카와 눈을 맞추고 눈물을 닦았다.

    사월 이십구 일 국경일 아침, 잠이 덜 깬 몽롱한 정신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정원을 바라봤다. 후드 집업을 걸쳐 입었는데 햇살을 보니 더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황금연휴로 한껏 들떠 있었다.

    역에 도착한 나는 평소처럼 승강장 의자로 가서 앉았다. 바람이 잠잠했다. 하마나호에는 드문드문 배들이 떠 있었다. 여기에는 하늘을 가린 나무도 없는데 여전히 눈앞이 어둑하고 흐릿했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야카가 오지 않았다. 전화도 걸어 봤지만 배터리가 다 됐다고 했으니 당연히 꺼져 있었다. 사쿠메역에서 출발했다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고 인도 쪽으로 나왔다. 보관대에 세워 둔 자전거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가다 보면 분명 아야카가 아끼는 크림색 자전거가 보이겠지, 생각하면서.

    천천히 비탈길을 오르는 도중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본 순간 구급차 한 대가 엄청난 속도로 나를 앞질러 갔다. 차도에 드리워진 나뭇잎 그림자들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 순간에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바로 머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슨자 고개 꼭대기에 도착하자 자전거를 타고 긴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그럴 리가 없다. 아야카일 리가 없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갔을 때 제일 먼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구겨진 우체통이 보였다. 역사 옆에 있던 우체통이었다.

    그 뒤로 보닛이 찌그러져 앞머리가 산처럼 솟아 있는 흰색 차가 공중전화 부스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부서진 유리 파편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자동차에 묻어 있는 검붉은 자국은... 설마 피?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크림색 자전거... 엉망으로 찌그러진 아야카의 자전거가 거기 있었다.

    아야카가 세상을 떠난 뒤의 일들은 솔직히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학교에는 갔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방과 후였고, 집에서도 문득 정신이 들면 밥을 먹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 분명 아야카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는데 기억은 흐릿하기만 했다. 한눈을 팔던 운전자가 공중전화 부스를 들이받았다고 했다. 엄마는 내게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아야카와 함께 갔던 카페에서 마스터에게 들은 이야기와 그날 나눈 대화를 떠올리자 아야카의 미소와 어른스러워 보였던 얼굴도 함께 되살아났다. 그랬다. 우리는 그날 노을 열차의 전설을 믿기로 했었다.

    그렇게 학교를 마치자마자 무언가에 이끌리듯 이곳으로 왔다. 하늘은 아직 밝았지만 구름은 없었다. 마스터는 오늘 같은 날에 보고 싶은 사람을 간절히 떠올리면 노을 열차가 나타난다고 했었다.

    정말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천천히 시선을 떨궜다. 아야카는 그날 나와 한 통화 때문에 사고를 당했다. 나한테 전화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환청이 아니다. 이건... 분명 열차가 철로를 달리는 소리다.
    잠시 후 푸르른 나무 사이를 가르며 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는 석양을 입고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제대로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렸다.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는 여자의 얼굴을 본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빛 후광을 뒤로하고 걸어오는 여자는 분명 아야카를 닮았다. 하지만 달랐다.

    “안녕!”

    마치 어제 본 사람과 인사하듯 경쾌하게 울린 목소리는 역시나 아야카였다.

    “이제야 만났네.”
    “아야카... 너 어떻게 된 거야? 왜....”

    교복 차림이었다. 금발이었던 머리도 검게 변해 있었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사고 나던 날, 사실은 이런 모습이었어.”
    “응?”
    “외박했다고 했잖아. 시내에서 같이 놀던 무리에서 빠지려고 그랬던 거야. 밤새도록 시달리기는 했지만, 아무튼 빠져나오긴 했지. 너한테 그 말을 하고 싶었어.”
    “미안해, 아야카.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어.”
    “무슨 소리야. 나야말로 제멋대로 굴어도 너라면 언제나 받아줄 거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투정 부렸어.”

    울음이 터졌다. 왜 아야카를 믿지 못했을까. 단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인데.

    “아유미, 앞으로는 같이 못 놀겠지만 잘 지내야 해.”
    “싫어, 그런 말 하지 마. 너랑 할 말이 많단 말이야. 웃기도 울기도 하고 설령 싸우더라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아유미, 내 말 잘 들어.”
    “응?”
    “너는 항상 부모님 잔소리 때문에 짜증 난다고 했었지? 나는 늘 그게 부러웠어. 나를 걱정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느껴 보고 싶었거든.”
    “아야카....”
    “내가 보기엔 복에 겨운 투정이었어.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 넌 솔직하고 순수한 게 장점이니까, 앞으로는 조금만 더 내키는 대로 살아봐.”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에 밤의 어둠 속으로 잠겨 가는 석양이 비쳤다.

    한 번 더 싱긋 웃은 아야카가 등을 돌렸다.
    “잠깐만...”

    아야카는 내 부름에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열차에 올라탔다.

    “아유미, 우리... 앞으로도 계속 친구지?”

    그때 처음으로 불안으로 물든 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내 앞에서는 언제나 씩씩한 모습만 보여 주던 아야카가 불안해하고 있었다.

    내 친구.... 나의 소중한 친구를 이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다.

    “당연하지. 우린 영원히 친구야!”

    똑바로 눈을 맞추고 외친 내 말에 아야카는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 순간 문이 닫히고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떠나가는 열차를 쫓아 뛰었다. 승강장 끝에서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먼 길을 떠나는 친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나, 잘 지낼 거야. 그러니까 아야카! 또 만나. 우리 또 만나는 거야!”

    내 목소리를 들은 아야카가 활짝 웃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아야카의 환한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드는 우리에게 결국 밤은 찾아왔고, 임무를 마친 노을 열차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