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 원료에서 산업 소재까지, 합성생물학이 다시 쓰는 제조업의 공식
거대한 발효조 안에서 미생물이 당을 먹으며 증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 의약품 원료에서 산업 소재까지, 합성생물학이 다시 쓰는 제조업의 공식

    - 석유 대신 미생물로 만든다

    거대한 발효조 안에서 미생물이 당을 먹으며 증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맥주도, 요구르트도 아니다. 말라리아 치료제의 원료와 화장품 성분, 섬유와 플라스틱을 만드는 화학물질이다. 생명체가 산업용 생산설비로 바뀌면서 제조업의 오래된 공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Key Message]
    * 미생물이 새로운 생산설비가 되고 있다. 합성생물학은 세포의 유전정보와 대사 경로를 설계해 필요한 물질을 생산한다. 미생물은 의약 원료부터 화학물질과 산업 소재까지 만드는 살아 있는 공장으로 진화하고 있다.

    * 바이오제조가 의약품 공급망을 바꾸고 있다. 희귀식물이나 특정 지역에 의존하던 의약 성분을 발효시설에서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이는 기후와 작황, 지정학적 위험에 흔들리는 원료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방법이 된다.

    * 석유화학의 일부가 발효조로 이동하고 있다. 미생물은 화장품 성분과 향료, 섬유, 접착제, 플라스틱 원료까지 생산하기 시작했다. 바이오제조는 기존 제품의 대체를 넘어 새로운 기능을 지닌 소재를 탄생시킬 가능성을 열었다.

    * 상용화의 승부처는 대량생산과 가격이다. 실험실에서 성공한 미생물이 대형 발효조에서도 같은 성능을 유지한다는 보장은 없다. 수율과 생산성, 정제 비용, 품질 안정성을 함께 해결해야 기술이 실제 사업으로 이어진다.

    * 바이오제조는 새로운 국가 산업 경쟁이다. 미래의 경쟁력은 우수한 균주뿐 아니라 시험생산 시설과 공정 데이터, 전문인력, 안정적인 수요에서 결정된다. 한국은 바이오의약품과 화학·소재산업의 제조 역량을 연결해 새로운 성장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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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는 공장의 등장
    공장이라고 하면 대개 철제 배관과 컨베이어벨트, 로봇 팔이 움직이는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원료가 투입되고 기계가 정해진 순서대로 가공하며, 마지막 공정에서 완성품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미래의 공장에서는 생산설비가 살아 움직일 가능성이 커졌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미생물이 원료를 먹고, 몸속에서 화학반응을 일으켜 사람이 원하는 물질을 만들어냈다.

    미생물을 제조에 이용하는 일 자체는 새롭지 않았다. 인류는 수천 년 전부터 효모로 술과 빵을 만들었고, 유산균으로 치즈와 요구르트를 생산했다. 전통적인 발효는 자연에서 발견한 미생물의 능력을 활용하는 기술이었다. 오늘날의 합성생물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미생물을 찾아 쓰는 데 머물지 않고, 원하는 물질을 생산하도록 세포의 유전정보와 대사 경로를 다시 설계했다.

    세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복잡한 제조공정과 닮아 있었다. 유전자는 작업 지시서 역할을 했고, 효소는 원료를 단계별로 가공하는 생산 장비처럼 움직였다. 세포가 흡수한 당과 영양분은 여러 화학반응을 거쳐 단백질이나 의약 성분, 향료, 화학소재로 바뀌었다. 연구자들은 불필요한 생산 경로를 차단하고 필요한 경로를 강화해 더 많은 목표 물질이 만들어지도록 했다.

    과거에는 이 과정에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연구자가 몇 개의 유전자를 바꾼 뒤 결과를 확인하고, 실패하면 다시 설계해야 했다. 이제는 DNA 합성과 유전자 편집, 실험 자동화, 인공지능이 결합하면서 수백·수천 개의 설계안을 동시에 시험할 수 있게 됐다. 로봇이 균주를 만들고 배양하며 생산량을 측정하면 인공지능이 결과를 분석해 다음 설계 후보를 제안했다.

    ‘설계하고, 만들고, 시험하고, 학습하는’ 순환이 빨라지면서 생물학은 관찰의 학문에서 설계의 기술로 이동했다. 반도체 엔지니어가 회로를 설계하듯 미생물의 대사 회로를 설계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합성생물학이 제조업의 차세대 기반 기술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다만 살아 있는 공장은 기계와 달랐다. 미생물은 인간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남고 증식하기 위해 움직였다. 제품 생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도록 설계하면 성장이 느려졌고, 오랫동안 배양하면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변이가 나타나기도 했다. 세포는 훌륭한 생산자였지만 언제나 순종적인 생산자는 아니었다.


    말라리아 치료제가 보여준 가능성
    합성생물학의 가능성을 세계에 각인시킨 사례 가운데 하나는 말라리아 치료제 아르테미시닌이었다. 아르테미시닌은 개똥쑥에서 얻는 성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농작물에 의존하는 공급 방식은 불안정했다. 재배 면적과 작황에 따라 공급량이 달라졌고, 가격이 오르면 농가가 재배를 늘렸다가 공급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하는 일이 반복됐다. 치료제가 필요한 지역에서는 안정적인 원료 확보가 중요한 문제였다.

    연구진은 효모의 유전정보를 바꿔 아르테미시닌의 전구체를 생산하도록 만들었다. 식물이 복잡한 단계를 거쳐 만들던 물질을 효모가 발효조 안에서 생산하게 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실험실 성과가 아니었다. 자연에서 소량으로 얻던 복잡한 의약 성분을 설계된 미생물로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례가 제시한 미래는 매력적이었다. 특정 지역의 약용식물이나 희귀 생물에 의존하던 성분을 발효시설에서 연중 생산할 수 있다면 공급망은 훨씬 안정될 수 있었다. 기후변화와 병충해, 재배 면적의 변화에 따른 영향을 줄이고, 일정한 품질의 원료를 반복해서 생산하는 길도 열렸다.

    그러나 아르테미시닌의 사례는 합성생물학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줬다. 기술적으로 생산에 성공하더라도 기존 농업 기반 원료보다 항상 저렴한 것은 아니었다. 천연 원료 가격이 내려가면 발효 방식의 경쟁력이 약해질 수 있었고, 새로운 생산법이 기존 농가와 시장 구조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했다. 실험실에서 성공한 기술이 시장을 곧바로 대체할 것이라는 단순한 기대가 흔들린 이유였다.

    그럼에도 의약품 분야에서 바이오제조의 적용 범위는 꾸준히 넓어졌다. 인슐린을 비롯해 백신과 항체, 호르몬, 효소는 이미 세포 배양과 발효를 통해 생산됐다. 합성생물학은 기존 바이오의약품 생산을 넘어 희귀 천연물과 복잡한 저분자 화합물, 새로운 단백질과 핵산 원료까지 제조 대상으로 끌어들였다.

    자연계에는 의약품 후보가 될 만한 물질이 풍부하지만 발견했다고 해서 곧바로 약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식물이나 해양생물에서 극소량만 얻어지는 물질은 연구에 필요한 양조차 확보하기 어려웠다. 화학적으로 합성하려면 반응 단계가 지나치게 많거나 원하는 구조만 골라 만들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이때 미생물은 복잡한 분자를 조립하는 초소형 생산라인이 됐다. 해당 물질을 만드는 유전자와 효소를 찾아 세포 안에 생산 경로를 구축하면 귀한 생물자원을 대량으로 채취하지 않고도 필요한 성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자연의 분자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서 나아가 구조를 일부 바꿔 효능과 안정성을 높인 유사 물질을 만드는 것도 가능해졌다.

    의약품 기업에 바이오제조는 생산기술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새로운 후보물질을 발견해도 원료를 안정적으로 만들지 못하면 임상시험과 상용화로 이어질 수 없었다. 어떤 물질을 발견할 수 있느냐와 함께 어떤 물질을 반복해서 생산할 수 있느냐가 신약개발의 경계를 결정했다. 합성생물학은 탐색과 제조 사이에 놓였던 병목을 줄이는 수단으로 부상했다.

    발효조로 들어간 화학산업
    합성생물학의 다음 목표는 의약품보다 훨씬 거대한 시장이었다. 플라스틱과 섬유, 접착제, 코팅재, 화장품 원료, 향료와 같은 산업 소재가 발효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원유를 정제하고 화학적으로 반응시켜 만들던 물질을 미생물이 대신 생산하도록 설계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석유화학산업은 지난 한 세기 동안 현대 생활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물질을 공급했다. 옷과 신발, 자동차 내장재, 스마트폰 부품, 포장재, 페인트와 세제에도 석유에서 출발한 화학물질이 들어갔다. 생산공정은 거대한 규모와 높은 효율을 갖췄지만 화석자원 의존과 탄소 배출이라는 부담도 함께 안고 있었다.

    바이오제조는 이 오래된 공급망에 다른 경로를 제시했다. 미생물이 식물에서 얻은 당이나 농업 부산물, 폐기물을 먹고 필요한 화학물질을 만들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장기적으로는 이산화탄소와 일산화탄소, 메탄 같은 기체를 탄소원으로 사용하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 공장의 굴뚝에서 나오던 탄소가 새로운 제품의 원료로 돌아가는 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생활 가까이 들어온 제품도 있었다. 화장품의 보습 성분으로 익숙한 히알루론산은 과거 동물 조직에서 추출됐지만 미생물 발효 생산이 확대되면서 안정성과 생산 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식물에서 얻던 향료와 화장품 성분 가운데 일부도 설계된 효모가 생산했다. 동물 없이 만드는 콜라겐과 가죽 대체 소재, 거미줄 단백질의 강도와 탄성을 본뜬 섬유도 바이오제조의 대상이 됐다.

    여기서 더 흥미로운 부분은 기존 제품을 똑같이 복제하는 데 있지 않았다. 생명체가 가진 기능을 새롭게 조합하면 석유화학 공정에서는 만들기 어려웠던 소재를 설계할 수 있었다. 가볍지만 강한 섬유, 특정 조건에서 스스로 결합하는 접착제, 사용 중에는 견고하지만 폐기 후에는 분해되는 포장재가 후보로 떠올랐다. 바이오제조가 단순한 친환경 대체기술이 아니라 신소재를 탄생시키는 플랫폼으로 평가받은 이유였다.

    기업의 관심도 탄소 감축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천연 원료는 산지와 계절, 품질 편차의 영향을 받았다. 지정학적 충돌이나 감염병, 물류 마비가 발생하면 공급이 갑자기 끊길 수도 있었다. 미생물을 이용해 필요한 지역에서 원료를 생산한다면 공급망을 짧게 만들고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었다.

    소비재 기업에는 제품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할 기회도 생겼다. 동물 유래 성분을 사용하지 않은 화장품, 희귀식물을 훼손하지 않고 만든 향료, 화석연료 사용을 줄인 섬유는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가치를 제공했다. 생산 방식 자체가 브랜드의 차별화 요소로 바뀐 셈이었다.

    하지만 ‘바이오 기반’이라는 이름이 제품의 친환경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았다. 미생물의 먹이로 사용할 당을 생산하려면 농지와 물, 비료가 필요했다. 발효조에 산소를 공급하고 온도를 조절하며 최종 물질을 분리하는 데도 에너지가 들었다. 수율이 낮으면 같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원료와 더 큰 시설이 필요했다.

    따라서 환경성을 판단하려면 원료 재배부터 생산과 운송, 사용과 폐기에 이르는 전 과정을 살펴야 했다. 석유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강조해서는 충분하지 않았다. 어떤 탄소원을 사용했고, 어느 정도의 에너지가 투입됐으며, 생산 부산물과 폐수가 어떻게 처리됐는지가 실제 환경효과를 좌우했다.

    한 방울과 수천 톤 사이
    합성생물학의 성패가 갈리는 곳은 화려한 연구실보다 거대한 발효조였다. 작은 플라스크에서 목표 물질이 만들어지는 순간은 분명 중요했다. 그러나 제조업의 관점에서 그것은 출발선에 불과했다. 몇 밀리리터의 배양액에서 성공한 미생물이 수십만 리터의 발효조에서도 같은 성능을 낸다는 보장은 없었다.

    작은 용기에서는 온도와 산소, 영양분을 비교적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대형 발효조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탱크의 위와 아래, 중심과 가장자리에서 산소와 온도, 산성도가 달라질 수 있었다. 미생물은 발효조 안을 순환하며 영양분이 풍부한 구간과 부족한 구간을 반복해서 통과했다. 실험실에서 뛰어난 생산성을 보이던 균주가 대형 설비에서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생산을 멈추는 일이 발생했다.

    오염은 더 큰 위협이었다. 다른 미생물이 들어오면 원료를 빼앗아 먹거나 전체 배치를 망칠 수 있었다. 배양액을 폐기하고 설비를 세척한 뒤 다시 검증하는 동안 공장은 멈췄다. 개발 단계에서는 최고의 생산량이 관심을 끌었지만, 공장에서는 수백 차례 생산해도 같은 결과를 내는 안정성이 더 중요했다.

    미생물이 물질을 만드는 것보다 발효액에서 그것을 꺼내는 일이 더 어려울 때도 있었다. 생산이 끝난 액체에는 목표 물질과 세포, 물, 영양분, 부산물이 뒤섞여 있었다. 원하는 물질의 농도가 낮거나 다른 성분과 성질이 비슷하면 정제 단계가 길어졌고 비용도 치솟았다. 발효에서 얻은 이익을 분리와 정제에서 모두 잃는 사업도 생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바이오제조에서는 세 가지 숫자가 중요했다. 미생물이 원료를 얼마나 제품으로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수율,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얼마나 많이 생산하는지를 나타내는 생산성, 발효액 속 목표 물질의 농도를 뜻하는 역가였다. 여기에 정제 회수율과 에너지 사용량, 설비 가동률까지 더해야 실제 제조원가가 드러났다.

    범용 소재 시장에 진출하면 조건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의약품이나 고급 화장품 원료는 생산량이 적어도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 플라스틱과 산업용 화학물질은 낮은 가격으로 막대한 양이 거래됐다. 미생물이 훌륭한 물질을 만든다는 사실만으로는 기존 석유화학 공정과 경쟁할 수 없었다. 값싼 원료, 높은 수율, 간단한 정제, 안정적인 대량생산이 동시에 충족돼야 했다.

    합성생물학 기업들이 과거 겪었던 어려움도 이 지점에서 비롯됐다. 실험실의 성공과 시장의 기대를 바탕으로 대형 생산시설에 투자했지만 생산량과 원가가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하나의 고부가가치 제품에서 확보한 기술을 범용 소재로 빠르게 확대하다가 자금 부담이 커지기도 했다. 기술적으로 만들 수 있는 제품과 경제적으로 팔 수 있는 제품은 서로 달랐다.

    이 실패는 합성생물학의 미래가 사라졌다는 신호가 아니었다. 오히려 바이오제조도 제조업의 냉정한 법칙을 피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좋은 유전자 설계와 특허만으로 공장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공정 엔지니어링, 품질관리, 원료 조달, 고객 계약, 설비 투자와 현금흐름이 기술만큼 중요했다.

    최근의 바이오제조 기업들은 이 교훈을 반영해 사업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거대한 자체 공장을 짓기보다 시험생산 시설에서 단계적으로 규모를 키우고, 전문 위탁생산기업과 협력하는 방식이 늘었다. 시장 가격이 낮은 범용 제품보다 소량으로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의약 원료와 특수 소재에서 먼저 사업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기술기업에서 제조 생태계로
    바이오제조는 천재적인 과학자 한 명이나 뛰어난 스타트업 하나로 완성되기 어려운 산업이었다. DNA를 합성하는 기업, 미생물을 설계하는 기업, 로봇 실험실을 운영하는 플랫폼, 발효와 정제를 담당하는 생산기업, 제품을 구매하는 제약·화학·소비재 기업이 연결돼야 했다. 개발 초기부터 최종 고객이 참여하지 않으면 품질은 뛰어나지만 시장이 원하지 않는 제품이 나올 위험이 컸다.

    반도체산업과 비슷한 분업 구조가 형성될 가능성도 커졌다. 모든 기업이 자체 생산시설을 보유하기보다 균주 설계에 집중하는 기업과 생산을 전문적으로 맡는 기업이 나뉘는 방식이다. 여러 제품을 유연하게 생산할 수 있는 바이오 파운드리가 등장하면 작은 기업도 막대한 공장 투자 없이 기술을 검증하고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바이오제조에서 공장의 가치는 탱크 크기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다양한 미생물과 공정을 다룬 경험, 오염을 막는 운영 능력, 배양 조건을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센서와 데이터, 제품별로 정제공정을 빠르게 바꾸는 역량이 중요했다. 같은 발효설비라도 어떤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느냐에 따라 생산 경쟁력이 달라졌다.

    데이터는 미생물을 개선하는 핵심 자산이 됐다. 어떤 유전자 조합이 특정 환경에서 잘 작동했는지, 배양 도중 생산량이 언제 떨어졌는지, 실험실과 대형 발효조 사이에서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지가 다음 설계를 좌우했다. 인공지능은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성공 가능성이 높은 균주와 공정 조건을 제안했다.

    바이오제조와 인공지능의 결합은 단순히 연구 속도를 높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생산 과정에서 쌓이는 데이터를 다시 균주 설계에 반영하면서 연구실과 공장 사이의 단절을 줄였다. 공장에서 발생한 문제가 다음 세대 미생물의 설계 조건이 되고, 개선된 미생물이 다시 공정 효율을 높이는 순환이 만들어졌다.

    기업의 인력 구성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생물학자는 세포를 이해했지만 대형 발효조의 유체 흐름과 열전달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었다. 화학공학자는 생산공정을 잘 알지만 세포가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방식을 놓칠 수 있었다. 데이터 과학자와 품질·규제 전문가, 공급망 담당자까지 개발 초기부터 함께 참여해야 실험실의 성과를 제품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기업이 합성생물학을 검토할 때는 기술의 새로움보다 적용 대상의 경제성을 먼저 따져야 했다. 공급이 불안정하고 가격이 높으며 구조가 복잡한 천연물은 유력한 후보가 될 수 있었다. 기존 화학공정의 단계가 많거나 유해한 물질을 사용하는 제품도 바이오 공정으로 전환할 가치가 있었다. 반대로 가격이 매우 낮고 기존 공정이 이미 고도로 효율화된 제품은 장기간의 개선 없이는 경쟁하기 어려웠다.

    합성생물학 기업과 수요기업 사이의 장기 구매계약도 중요해졌다. 생산기업은 판매처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형 설비에 투자하기 어려웠고, 구매기업은 안정적인 품질과 물량이 확인되지 않으면 기존 공급망을 바꾸기 어려웠다. 양쪽이 초기부터 목표 가격과 생산 규모를 공유하고 위험을 분담해야 새로운 공정이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다.

    바이오제조를 둘러싼 국가 경쟁
    바이오제조는 어느 순간 과학기술정책을 넘어 산업안보의 언어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팬데믹은 의약품과 백신, 핵심 원료의 생산능력이 국가의 위기 대응력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지정학적 갈등과 물류 혼란은 소수 국가에 집중된 공급망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도 드러냈다.

    설계된 미생물과 발효시설을 이용해 필요한 원료를 자국이나 인접 지역에서 생산할 수 있다면 공급망을 다변화할 수 있었다. 같은 생산 기반을 활용하면서 균주와 공정을 바꿔 여러 물질을 생산하는 유연성도 기대됐다. 바이오제조가 새로운 형태의 분산형 제조 기반으로 주목받은 배경이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는 합성생물학과 바이오제조를 전략 산업으로 다루며 연구개발, 생산시설, 표준, 인력 양성을 연결하려 했다. 경쟁의 기준도 논문과 특허의 숫자에서 실제 생산능력으로 이동했다. 아무리 뛰어난 균주를 개발해도 이를 수천 리터 이상의 공정으로 확장할 시설과 인력이 없다면 산업적 성과를 다른 나라에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 경쟁에서 활용할 만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을 통해 대규모 세포 배양과 엄격한 품질관리 역량을 축적했고, 석유화학과 정밀화학, 소재산업에서도 강한 제조 기반을 보유했다. 식품과 화장품 분야에는 오랜 발효 경험과 세계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브랜드가 있었다.

    이 역량을 연결한다면 바이오의약품 생산을 넘어 의약 원료와 기능성 소재, 정밀화학제품으로 확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생명과학 연구자와 화학공정 전문가가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대기업의 생산·판매 역량과 스타트업의 균주 설계 능력을 결합하는 방식이 필요했다. 바이오제조를 하나의 업종이 아니라 여러 산업을 연결하는 기반기술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였다.

    다만 바이오의약품에서 거둔 성공이 산업 소재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의약품과 범용 화학물질은 가격 구조와 생산 규모, 규제 방식이 크게 달랐다. 의약품은 높은 순도와 엄격한 품질관리가 핵심이지만 산업 소재는 압도적인 원가 경쟁력과 대량생산 능력이 요구됐다. 같은 발효기술을 사용하더라도 서로 다른 산업 전략이 필요했다.

    정책 역시 연구비 지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기업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는 구간은 실험실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뒤 상업 생산에 도달하기 전까지였다. 수십 리터에서 수백 리터, 다시 수천 리터로 규모를 키울 때마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지만, 성공 여부가 불확실해 민간기업이 모든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험생산 시설과 공정 전문인력, 표준화된 시험 방법이 필요한 이유였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초기 수요를 만들거나 장기 구매를 지원하는 정책도 기술과 시장 사이의 간격을 줄일 수 있었다. 연구실에서 탄생한 균주가 해외 생산시설로 이동하지 않고 국내 제조업으로 이어지려면 규모 확대를 위한 기반이 뒷받침돼야 했다.

    안전과 신뢰도 빠질 수 없었다. 유전적으로 설계된 미생물이 시설 밖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생산에 사용된 균주와 원료를 추적할 수 있어야 했다. 바이오 기반이라는 이유만으로 제품이 친환경적이거나 안전하다고 단정해서도 안 됐다. 과장된 홍보는 단기적으로 관심을 끌 수 있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산업 전체의 신뢰를 흔들 수 있었다.

    제조업의 새로운 설계도
    합성생물학은 공장의 모습을 하루아침에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석유화학 공정은 오랜 시간 축적된 설비와 공급망, 낮은 원가를 갖추고 있으며 많은 제품에서 여전히 강력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바이오제조가 모든 화학공장을 대체한다는 전망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대신 변화는 기존 방식으로 만들기 어렵거나 공급이 불안정한 제품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컸다. 희귀한 의약 성분과 고기능성 화장품 원료, 복잡한 정밀화학제품, 새로운 성능을 가진 소재가 먼저 바이오 공정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기술과 생산 경험이 쌓이고 원가가 내려가면 적용 범위가 더 큰 시장으로 넓어질 것이다.

    기업에는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해졌다. 미생물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보다, 현재 공급망에서 무엇이 가장 취약한가를 먼저 물어야 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가보다, 기존 제품보다 안정적이고 경제적이며 지속가능하게 공급할 수 있는가를 따져야 했다.

    바이오제조 경쟁의 승자는 가장 놀라운 미생물을 발표한 기업이 아닐 수 있다. 균주의 성능을 안정적인 공정으로 옮기고, 공장의 생산량을 고객의 주문으로 연결하며, 환경성과 안전성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기업이 시장을 차지할 가능성이 컸다. 과학적 발견을 제조업의 언어로 번역하는 능력이 중요해진 것이다.

    거대한 발효조 속 미생물은 오늘도 당과 영양분을 먹으며 물질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은 의약품과 향료, 화장품 원료처럼 일부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섬유와 접착제, 포장재와 정밀화학제품까지 생산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철과 기계로 가득했던 공장에 살아 있는 생산설비가 들어오기 시작한 셈이다.

    제조업의 미래를 결정하는 경쟁은 생명체를 설계하는 기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방울의 성공을 수천 톤의 제품으로 확대하고, 그것을 일정한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으로 공급해야 한다. 합성생물학이 약속하는 변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은 미생물이 신기한 물질을 만들었을 때가 아니라, 그 물질이 공장을 떠나 산업과 일상 속으로 안정적으로 들어왔을 때다.

    Reference
    The White House Office of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 March 2023, Bold Goals for U.S. Biotechnology and Biomanufacturing: Harnessing Research and Development to Further Societal Goals
    UK Department for Science, Innovation and Technology, December 2023, National Vision for Engineering Bi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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