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전환과 전력시장 설계 혁신
기후 변화 대응과 지속가능한 개발 목표(SDGs)를 달성하기 위한 전 세...


  • 에너지 전환과 전력시장 설계 혁신: 시스템적 접근의 필요성

    재생에너지 시대의 전력시장은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기후 변화 대응과 지속가능한 개발 목표(SDGs)를 달성하기 위한 전 세계적 에너지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다.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의 빠른 확산은 긍정적인 신호이지만, 이로 인해 기존의 전력시장 설계가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는 지적이 증가하고 있다.

    시장 운영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간헐적이고 비예측적인 에너지원의 특성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의 핵심을 짚은 최근 논문이 바로 칠레 아돌포 이바녜스 대학교(Universidad Adolfo Ibáñez)의 경제학자 리카르도 라이네리(Ricardo Raineri) 교수를 중심으로 한 연구팀의 논문이다. 이들은 학술지 'Energies' (2025년 3월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전력시장 설계 혁신 없이는 재생에너지 중심 전력체계는 불안정성을 내포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과 시장 신호 왜곡 문제
    풍력과 태양광은 자연 조건에 따라 생산량이 변동하는 특성을 지니며, 저장장치 없이 공급을 예측하고 제어하기 어렵다. 이는 수요와 공급을 실시간으로 맞춰야 하는 전력 시스템에 심각한 부담을 준다. 기존 전력시장은 기본적으로 예측 가능한 기저부하 발전(예: 석탄, 원자력)을 중심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간헐적인 재생에너지가 대규모로 투입될 경우 시장가격의 극단적 변동성, 공급 과잉 또는 부족 사태가 빈번해진다.

    특히 전력도매시장에서 도입된 ‘최소 한계비용(marginal cost)’ 기반 가격 결정은 재생에너지의 ‘0에 가까운 변동비용(zero marginal cost)’ 특성상 시장가격을 지나치게 낮추며, 장기적으로는 안정적 투자 유인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는 '가격 신호(price signal)' 왜곡 문제로 불리며, 새로운 설계 방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칠레 사례: 시스템 유연성 확보의 실패와 교훈
    라이네리 교수의 연구는 칠레의 전력시장 사례를 바탕으로 실증적 분석을 수행했다. 칠레는 태양광 발전 비중이 20%를 넘기며 빠른 에너지 전환을 추진한 국가 중 하나이지만, 전력망과 수요관리 체계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재생에너지 급증으로 인한 전력 초과 생산이 빈번해졌고, 전력 수요가 낮은 낮 시간대에 도매가격이 0 또는 음수(-)를 기록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반대로 피크 시간대에는 급격한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폭등하거나, 디젤 등 고비용 발전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극단적 가격 스파이크’와 ‘전력 낭비’ 현상은 시장 참여자들에게 예측 불가능성과 수익 불확실성을 가중시켜 투자 기피로 이어졌다. 라이네리 교수는 “단기·실시간 조정시장(ramping market), 부대 서비스 시장(ancillary services), 용량 시장(capacity market) 등 보완 제도의 미비가 재생에너지 전환의 효율성을 저해한다”고 분석했다.

    전력시장 설계의 핵심 요소: 4가지 개혁 방향
    연구팀은 에너지 전환을 성공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전력시장 개혁을 위해 다음의 4가지 핵심 요소를 제시했다.

    1. 용량 시장의 도입
       – 실시간 수요 대응이 어려운 재생에너지를 보완하기 위한 ‘백업 발전소’ 확보를 위해, 공급 안정성을 기준으로 장기 계약 형태의 용량 확보 시장이 필요하다.

    2. 부대서비스 시장의 확대
       – 주파수 조정, 전압 유지, 예비력 확보 등 전력 품질 유지를 위한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자원의 보상을 제도화해야 한다.

    3. 실시간 가격 신호 강화
       – 정시시장(day-ahead market)에 국한되지 않고, 수분 단위 가격 변동을 반영하는 초단기 시장(sub-hourly market) 설계를 통해, 수요 반응(demand response)을 촉진해야 한다.

    4. 디지털화 및 분산자원 통합
       – 스마트미터, 가상발전소(VPP), 전기차 충전제어 등 디지털 인프라를 활용한 분산형 자원의 시장 참여 유도가 필요하다.

    미국과 유럽의 대응: 시사점과 한계
    미국 캘리포니아 ISO(CAISO)와 텍사스 ERCOT은 이미 초단기 시장과 수요반응 프로그램을 확대 도입하고 있으며, 유럽연합은 EU 전력시장 개혁안(2023년)을 통해 역내 실시간 전력거래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례도 여전히 재생에너지 과잉 공급 시 가격 붕괴, 가동 가능한 예비력 부족, 그리드 과부하 문제 등 복합적 병목 현상을 겪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시장 설계를 바꾸는 것을 넘어서, 재생에너지 확산 속도와 전력망 인프라 투자, 수요예측 정밀도 향상, 거버넌스 간 조정 체계 확립 등이 함께 이루어져야 실질적인 전환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기술과 시장의 동시 혁신이 에너지 전환의 열쇠
    에너지 전환은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설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리 풍부한 재생에너지가 존재하더라도, 이를 적시에 분배하고 균형 있게 소비하지 못한다면 경제성과 안정성 모두를 잃을 수 있다. 따라서 전력시장 설계는 단지 가격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지능’을 결정하는 틀이 되어야 한다.

    리카르도 라이네리 교수와 그의 연구진이 제안한 전력시장 설계 개혁은 에너지 현실주의적 관점에서도 매우 유의미하다. 현실적 제약 속에서 최적의 운영을 도출하고, 사회 전체의 전환 비용을 줄이며, 기술 혁신과 제도적 정비가 병행될 때 지속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술을 도입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더 중요한 일—즉, 시스템을 다시 설계하는 용기다.

    (Resource – Energies, March 2025, “Market Design Innovations for High Renewable Penetration: Lessons from Chile,” by Ricardo Raineri et al. © MDPI. All rights reserved.)